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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루이 비통(Louis Vuitton)의 역사 1탄(설립 ~ LVMH 이전)

 

패션이나 명품에 관심이 별로 없거나 잘 모르더라도 루이 비통의 모노그램 스피디를 모르시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길을 지나다니다 보면 너무 많이 보여서 이름은 모르더라도 보면 무엇인지 알 수밖에 없는 모노그램 스피디는 오랫동안 루이 비통의 스터디셀러이기도 합니다.

3초 백이라는 이름이 생길 만큼 대중적이 된 명품. 이렇게 명품을 대중화시킨 루이 비통은 매우 오랜 기간 동안 명품 브랜드 매출 1위를 놓친 적이 없는 브랜드로 명품 브랜드의 대명사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품이 지금처럼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절에도 루이 비통은 명품 브랜드 하면 가장 먼저 떠올랐던 브랜드이며 수많은 명품 브랜드들을 보유하고 있는 LVMH 그룹에서도 LVMH 매출의 절반 이상을 책임지고 있을 만큼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브랜드일 뿐만 아니라 여전히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브랜드인 루이 비통은 샤넬과 에르메스와 함께 대한민국의 3대 명품으로 불리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루이 비통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어떠한 과정을 거쳐 오늘의 루이 비통이 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루이 비통(Louis Vuitton)

루이 비통은 1821년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목공 기술을 자연스럽게 익힌 루이 비통은 14살 때 한 푼도 없이 집을 무작정 나옵니다. 파리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던 파리로 떠났고 걷고 걸었습니다. 1837년, 그가 16세가 되던 해 그는 드디어 파리에 도착합니다. 파리에 도착한 루이 비통은 트렁크 제작자인 무슈 마레샬(Monsieur Maréchal)의 견습생이 됩니다.

 

마차와 초기 기차 여행의 시대였던 당시에는 귀족들에게 거래되던 맞춤형 상자와 트렁크 등의 고급 제품을 만드는 무슈 마레샬팀에서 단시간 내에 핵심 멤버가 됩니다. 그는 그곳에서 17년간 일한 후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고 방돔 광장 근처인 4 Rue Neuve-des-Capucines에 1854년, 첫 번째 공방을 열게 됩니다.

 

당시만 해도 나무로 된 소재에 가죽으로 장식을 한 트렁크는 매우 무거웠습니다. 또한 윗부분이 볼록해 여러 개의 트렁크를 쌓을 수 없었는데 루이 비통은 1858년 가벼운 캔버스 재질에 방수 처리를 하고 모양 역시 쌓을 수 있도록 직육면체 형태의 여행용 트렁크 '그레이 트리아농 캔버스'를 출시합니다. 그레이 트리아농 캔버스는 출시되자마자 유명 인사들이 사용을 하게 되고 점점 알려지게 되면서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큰 인기를 끌게 됩니다. 

당시의트렁크와-루이비통의그레이-트리아농-캔버스
당시의 트렁크(좌) / 그레이 트리아농 캔버스(우, 1958년, 루이 비통)

 

 

그레이 트리아농 캔버스의 성공으로 루이 비통은 1859년, 사업장을 아니에르(Asnières) 지역에 확장하게 됩니다. 이곳은 파리에서 몇 마일 떨어진 교외 지역으로 처음에 아니에르의 루이 비통 사업장에서 일하는 직원은 20명이었지만 1900년에는 100명의 직원이 일하게 되었으며 1914년에는 225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수십 년이 지나 규모가 더욱 커진 아니에르의 사업장이 있는 곳으로 루이 비통의 가문도 거처를 옮기게 되고 현재 이 저택은 개인 소유의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니에르 공방은 현재도 전 세계 주요 고객들의 주문을 책임지고 있으며 170여 명의 장인이 가죽제품을 디자인하고 있습니다. 

 

1885년에 루이 비통은 영국 런던의 옥스퍼드 거리에 첫 해외 매장을 오픈하게 되고 1886년에는 루이 비통의 아들 조르주 비통이 자물쇠를 트렁크에 부착하는 아이디어를 내 트렁크를 아무나 열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레이 트리아농 캔버스의 성공은 수많은 모조품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자 루이비통은 모조품 생산을 막기 위해 새로운 재질의 제품을 개발하는데 이것이 루이 비통의 다미에입니다. 루이 비통 다미에 패턴은 1888년 개발된 것으로 흔히 모노그램이 유행한 뒤 나중에 나온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모노그램 이전에 다미에가 먼저 출시되었습니다. 

루이비통-다미에
루이비통 다미에 패턴

 

루이 비통 하우스의 설립자인 루이 비통은 1892년 사망합니다. 그의 아들인 조르주 비통이 회사의 경영권을 갖게 되고 조르주 비통은 더욱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여행수단이 기차에서 자동차로 넘어가던 시기로 조르주 비통은 이에 맞추어 트렁크보다 작고 실용적인 가방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모조품을 만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다미에 패턴을 개발하였지만 얼마 되지 않아 다미에 역시 모조품이 생깁니다. 다미에 캔버스의 모조품 역시 점점 늘어나게 되자 루이 비통은 모노그램 캔버스를 개발합니다.

루이비통-모노그램
루이비통 모노그램

 

1896년 루이 비통하면 떠오르는 패턴인 모노그램 캔버스가 탄생합니다. 그러나 브랜드의 디자인 위조 방지를 위하여 개발된 모노그램은 현재 모조품이 가장 많은 디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니 참 아이러니합니다. 

 

성공을 거듭하며 루이 비통은 1914년, 샹제리제 거리에 세계에서 가장 큰 여행 제품 매장을 오픈합니다. 

샹제리제-루이비통
샹제리제의 루이 비통 매장

 

1930년에는 스피디 (Speedy) 백과 키폴 (Keepall)이 출시됩니다. 스피디와 키폴은 현재까지도 루이 비통의 대표 가방 중 하나로 이는 여행용 가방만을 만들던 루이 비통이 개인용 가방도 만든 최초의 시도입니다. 이렇게 개인용 가방까지도 만들기 시작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32년 노에 (Noé) 백이 출시되었는데 이는 원래 샴페인, 또는 와인 병을 담기 위해 디자인된 가방입니다.

스피디와 키폴, 노에 백은 현재까지도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으며 특히 스피디는 3초 백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낼 만큼 대중적인 가방이 되었습니다.

루이비통-키폴-스피디-노에
루이 비통 키폴(좌) / 스피디(중앙) / 노에(우)

 

루이 비통(Louis Vuitton)의 역사 2탄(1987년 LVM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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